티치아노는 어떤 화가였을까? 색으로 그림을 말한 베네치아의 거장

티치아노는 약 60년 동안 베네치아 화단을 이끈 르네상스 화가입니다.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를 위해 그렸고, 말년의 자유로운 붓질은 루벤스에게 이어졌습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는 르네상스 베네치아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로 꼽힙니다. 1488–1490년 무렵 베네치아 공화국 북쪽 산골 마을 피에베 디 카도레에서 태어나, 약 60년 동안 베네치아 화단의 맨 앞자리를 지켰습니다. 선보다 색으로 형태를 만드는 그의 방식과 말년의 자유로운 붓질은 뒤이어 루벤스 같은 바로크 화가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대표작과 삶의 장면을 따라가며 그의 특징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산골 마을에서 온 소년

티치아노는 벨루노 근처 피에베 디 카도레 출신입니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습니다. 말년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1474년생이라고 했지만, 오늘날 연구자들은 이를 믿기 어렵다고 보고 1488–1490년 무렵으로 봅니다. 아버지 그레고리오는 군인이자 목재 상인이었고, 카도레 지역 광산을 관리하기도 했습니다. 지역에서 자리 잡은 집안 출신이었던 셈이고, 평생 계약과 연금 문제에 밝았던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

젊은 시절 기록은 생각보다 흐릿합니다. 작가 로도비코 돌체는 그에게 세바스티아노 주카토, 젠틸레 벨리니, 조반니 벨리니, 조르조네라는 네 명의 스승이 있었다고 썼고, 바사리는 처음엔 조반니 벨리니에게서 배웠다고 했습니다. 어느 쪽도 문서로 확인되지 않으며, 1510년 이전 작품 기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베네치아에서 그는 조르조네, 로렌초 로토,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같은 젊은 화가들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조르조네와의 경쟁

1507–1508년 조르조네는 리알토 다리 옆 독일 상인들의 상관 건물인 폰다코 데이 테데스키의 벽화를 맡았습니다. 티치아노도 1509년 무렵 이 작업에 참여해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경쟁자였고 화풍이 너무 비슷해서, 한때 조르조네 작품으로 알려졌던 그림 가운데 상당수가 나중에 티치아노 작품으로 다시 분류되었습니다. 조르조네는 1510년에 세상을 떠났고, 티치아노는 이듬해 파도바의 스쿠올라 델 산토에 프레스코화를 그렸습니다.

베네치아를 놀라게 한 「성모 승천」

그의 이름을 단번에 알린 작품은 1515년에 의뢰받아 1516년에 완성한 「성모 승천」입니다. 베네치아 프라리 성당의 중앙 제단을 위해 그린 그의 가장 큰 패널화이며, 지금도 처음 걸린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땅 위의 사도들, 구름을 타고 오르는 성모, 하늘에서 기다리는 하느님을 강렬한 색과 역동적인 구도로 하나로 묶은 이 그림은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같은 해 원로 거장 조반니 벨리니가 세상을 떠나자, 티치아노는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어 그 자리를 약 60년 동안 지켰습니다.

페라라 공작의 신화화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는 성 안의 개인 서재를 위해 신화 그림을 주문했습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바쿠스와 아리아드네」(1520–1523년 무렵), 그리고 지금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안드로스 섬 사람들의 바쿠스 축제」와 「비너스 숭배」가 이 연작입니다. 사라진 명작도 있습니다. 「순교자 성 베드로의 암살」(1530년)은 1867년 화재로 불타 지금은 모사본과 판화로만 전해집니다.

황제의 궁정 화가가 되다

그의 후원자는 베네치아 사람들에서 북이탈리아 군주들로, 마지막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교황청으로 넓어졌습니다. 1533년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는 그를 궁중백과 황금 박차 기사로 임명했고, 이해부터 궁정 화가로 삼았습니다. 1548년에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황제를 만나 뮐베르크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카를 5세 기마상」을 그렸습니다. 교황 바오로 3세와 작가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초상도 손꼽히는 걸작이며, 1571년에도 펠리페 2세는 그에게 200스쿠디의 연금을 다시 확인해 주었습니다.

선이냐, 색이냐

1530년부터 1550년 사이 그의 붓질은 점점 느슨하고 표현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1544–1546년의 파르네세 가문 「다나에」가 이 시기 작품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다나에」를 보고 ‘디세뇨(소묘와 구성)’가 부족하다고 평했다고 전해지고, 후대 비평가 잰슨은 그 색채를 높이 샀습니다. 선을 중시한 피렌체와 색을 중시한 베네치아, 티치아노는 바로 베네치아 쪽을 대표하는 화가였습니다.

펠리페 2세를 위한 ‘시(포에시에)’

그는 펠리페 2세를 위해 스스로 ‘포에시에(시)’라고 부른 신화화 연작을 그렸습니다. 주로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에게서 소재를 가져온 「다나에」, 「비너스와 아도니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디아나와 악타이온」, 「디아나와 칼리스토」, 「에우로페의 납치」, 「악타이온의 죽음」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는 정해진 설계대로 그리지 않고 구도를 몇 번이고 고쳤으며, 바꿨던 배치를 다시 되돌리기도 했습니다. 밑그림은 그저 참고 정도로 여겼습니다. 1590년 로마초는 그를 이탈리아뿐 아니라 세상 모든 화가 가운데 ‘작은 별들 사이의 태양’이라고 불렀습니다.

마지막 「피에타」와 흑사병

마지막 작품은 프라리 성당의 자기 무덤에 두려던 약 378×348센티미터의 「피에타」로, 그는 자신을 성 히에로니무스의 모습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이 그림은 미완성으로 남아 팔마 일 조바네가 마무리했고, 1814년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들어갔습니다. 티치아노는 1576년 8월 27일 베네치아에 역병이 돌던 중에 86–90세 무렵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프라리 성당 십자가 제단 아래 묻혔지만 「피에타」는 그 곁에 놓이지 못했고, 상속자였던 아들 오라치오도 곧 역병으로 유언 없이 숨졌습니다. 초상화, 풍경, 신화, 종교화를 모두 같은 솜씨로 다룬 그의 영향은 베로네세를 거쳐 루벤스로 이어졌습니다.

티치아노로 배우는 한국어 표현

표현 뜻 예문
이름을 알리다 유명해지다 그는 제단화 한 점으로 이름을 알렸다.
두각을 나타내다 재능이 눈에 띄다 젊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어깨를 나란히 하다 실력이 비슷하다 조르조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자리를 지키다 한 위치를 오래 유지하다 60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손을 놓다 하던 일을 그만두다 그는 끝까지 붓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연습: 「성모 승천」 사진을 보고 ‘이름을 알리다’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를 넣어 한국어 문장 세 개를 써 보세요.

티치아노 이야기로 언어 배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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