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는 왜 이탈리아의 국민 영웅일까? '가라, 내 마음이여'와 30만 명의 배웅
주세페 베르디는 아내와 아이들을 잃은 뒤 '나부코'로 재기했고, 이름까지 이탈리아 통일의 구호가 된 작곡가입니다. 전설과 사실을 나눠 봅니다.
주세페 베르디(1813–1901)가 이탈리아의 국민 영웅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의 오페라가 이탈리아 통일 운동, 곧 '리소르지멘토'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페라 '나부코'의 합창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Va, pensiero)는 통일의 염원과 겹쳐졌고, 그의 이름 VERDI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이탈리아의 왕(Vittorio Emanuele Re D'Italia)"의 머리글자로 읽혀 구호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일부는 나중에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것이 최근 연구의 지적입니다. 하지만 1901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밀라노 거리에 약 30만 명이 모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관집 아들로 태어나다
베르디는 1813년 10월 9일 또는 10일, 부세토 근처의 작은 마을 레 론콜레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이 지역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에 속해 있었습니다. 세례 기록에는 "어제 태어났다"고만 적혀 있어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고, 베르디 자신은 늘 9일을 생일로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여관을 운영했고 어머니는 실을 잣는 일을 했습니다.
소년의 운명을 바꾼 사람은 부세토의 상인 안토니오 바레치였습니다. 식료품상이자 증류업자로 지역 필하모닉 협회를 이끌던 그는 베르디를 후원하며 집에 들였고, 훗날 장인이 되었습니다.
음악원 입학에 떨어진 청년
바레치의 도움으로 밀라노에 간 베르디는 밀라노 음악원에 지원했지만 떨어졌습니다. 대신 빈첸초 라비냐에게 개인적으로 배웠습니다. 입학을 거절당한 그 청년이 훗날 그 세기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 작곡가가 되었다는 사실은, 거절을 겪어 본 사람에게 작은 위로가 됩니다.
2년 사이 세 번의 장례
1836년 5월 베르디는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해 두 아이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1838년 8월 딸 비르지니아가, 1839년 10월 아들 이칠리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 마르게리타마저 26세에 뇌염으로 숨졌는데, 마침 그가 희극 오페라 '하루만의 임금님'을 쓰던 때였습니다.
첫 오페라 '오베르토'는 1839년 라 스칼라 극장에 올랐지만, 슬픔 속에서 쓴 희극은 단 한 번 공연하고 막을 내린 실패작이 되었습니다. 20대 후반의 베르디는 가족도, 자신감도 잃은 상태였습니다.
'나부코'로 다시 일어서다
1879년 베르디가 남긴 자전적 회고에 따르면, 그는 작곡을 그만두려 했습니다. 그런데 라 스칼라의 흥행주 메렐리가 다른 작곡가가 거절한 대본,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의 이야기를 억지로 안겨 주었습니다. 집에 와서 탁자에 던졌더니 대본이 저절로 펼쳐졌고, 눈에 들어온 한 구절 때문에 끝까지 읽게 되었다고 베르디는 말했습니다.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다소 미화되었다고 보지만, 당시 그의 마음을 잘 보여 주는 일화입니다.
1842년 3월 9일 라 스칼라에서 초연된 '나부코'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해 안에 약 60회의 공연이 더 이어졌습니다. 가장 유명한 곡은 3막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으로,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전설과 사실 사이
초연 때 관객이 애국심에 불타 금지를 무릅쓰고 이 합창을 다시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전해져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그날 앙코르를 받은 곡이 다른 찬가였고, 베르디를 통일 운동의 음악적 기수로 보는 이미지도 일부는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반면 '비바 베르디' 구호는 1859년 나폴리에서 실제로 쓰였습니다. 베르디는 1861년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1874년 상원의원에 임명되었지만, 정치 활동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갤리선의 세월'과 말년의 걸작
성공 이후 베르디는 여러 극장을 위해 쉴 새 없이 오페라를 썼고, 이 시기를 스스로 '갤리선의 세월'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노력은 '리골레토'(1851), '일 트로바토레'와 '라 트라비아타'(둘 다 1853)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공연되는 '라 트라비아타'도 초연은 실패였습니다.
1871년 카이로에서 '아이다'가 초연되었고, 1874년에는 작가 만초니를 추모하는 '레퀴엠'이 밀라노에서 연주되었습니다. 이후 대본가 보이토와 손잡고 '오텔로'(1887)를 썼고, 79세에 희극 '팔스타프'(1893)를 내놓았습니다. 젊은 날 희극으로 크게 실패했던 사람이 마지막을 희극 걸작으로 장식한 셈입니다.
음악가들의 집, 그리고 30만 명의 배웅
베르디는 사재를 들여 밀라노에 은퇴한 음악가들을 위한 쉼터 '카사 디 리포조'를 세웠습니다. 1901년 1월 27일 87세로 세상을 떠났고, 약 한 달 뒤 유해가 그곳 지하 묘소로 옮겨질 때 토스카니니가 820명의 합창단과 함께 '가라, 내 마음이여'를 지휘했습니다. 거리에는 약 30만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베르디로 배우는 한국어 표현
| 표현 | 뜻 | 예문 |
|---|---|---|
| 바닥을 치다 | 가장 나쁜 상태에 이르다 | 가족을 잃은 뒤 베르디의 삶은 바닥을 쳤다. |
| 붓을 꺾다 | 글이나 작품 쓰기를 그만두다 | 그는 한때 붓을 꺾으려 했다. |
| 재기에 성공하다 | 실패 뒤 다시 일어서다 | '나부코'로 그는 재기에 성공했다. |
| 심금을 울리다 | 마음 깊이 감동을 주다 | 그 합창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
| 유종의 미를 거두다 | 끝을 훌륭하게 마무리하다 | '팔스타프'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
연습: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선 경험을 떠올려 '바닥을 치다'와 '재기에 성공하다'를 넣어 세 문장을 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