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1세는 왜 평생 결혼하지 않았을까? '처녀 여왕'의 선택과 그 시대

엘리자베스 1세는 왜 평생 결혼하지 않았을까? '처녀 여왕'의 선택과 그 시대

엘리자베스 1세가 모든 청혼을 거절한 것은 결혼이 왕권과 나라의 평화, 자신의 안전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 선택이 44년 통치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살펴본다.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 결혼하지 않은 것은 어떤 남편을 고르든 치르고 싶지 않은 대가가 따라왔기 때문이다. 외국 왕자와 결혼하면 잉글랜드가 남의 나라 전쟁과 종교 갈등에 휘말릴 수 있었다. 국내 귀족을 고르면 궁정에 질투와 파벌 싸움이 생겼다. 게다가 당시 관념으로는 남편이 여왕의 권력을 나눠 갖거나 아예 차지하려 들 수도 있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 스웨덴의 에리크 14세, 프랑스 공작 등이 수십 년 동안 청혼했지만 그녀는 끝내 거절했다. 즉위 초에는 "결혼한 여왕보다 차라리 혼자 사는 거지 여인이 훨씬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유는 어린 시절을 보면 짐작이 간다. 세 살이 되기 전 아버지가 어머니를 처형했고, 스무 살 무렵에는 언니가 그녀를 런던탑에 가뒀다.

어머니를 잃은 공주

엘리자베스는 1533년 9월 7일 그리니치에서 국왕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다. 아들을 원했던 헨리와 앤의 사이는 빠르게 틀어졌고, 앤은 1536년 5월 19일 참수됐다. 세 살도 안 된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선언됐다. 1543년, 열 살 때 왕위 계승 순서에 복귀했지만 동생 에드워드와 언니 메리 뒤였다.

여러 언어를 자유롭게 쓴 공주

대신 그녀는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가정교사 캣 애슐리에게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배웠고, 그린들에게 그리스어를, 이어서 학자 로저 애스컴에게 배웠다. 열두 살에 계모 캐서린 파의 기도서를 이탈리아어·라틴어·프랑스어로 옮겼고, 어른이 되어서는 키케로와 타키투스 등의 글도 번역했다. 통역 없이 외국 대사와 직접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외교 무대에서 큰 무기였다.

스캔들과 런던탑

1548년 무렵, 열네 살쯤이던 엘리자베스는 계모의 새 남편 토머스 시모어의 집에서 원치 않는 '장난'에 시달렸고 그해 5월 그 집을 떠났다.

더 위험했던 것은 언니의 시대였다. 개신교도들의 와이엇 반란이 일어나자 메리 1세는 1554년 3월 18일 엘리자베스를 런던탑에 가뒀고, 이후 1년 가까이 가택 연금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평생 쓸 정치 감각을 이때 익힌 셈이다.

스물다섯 살의 여왕

1558년 11월 17일 메리가 세상을 떠나자 스물다섯 살의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올랐다. 대관식은 1559년 1월 15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렸는데, 날짜는 점성술사 존 디가 골랐다.

첫 과제는 종교였다. 1559년 수장령으로 그녀는 교회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고, 이 체제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잉글랜드 국교회로 자리 잡았다. 나랏일은 최측근 윌리엄 세실에게 크게 의지했다.

끝없이 기다린 구혼자들

의회와 신하들은 후계자를 위해 결혼을 원했다. 후보는 넘쳐났다.

  • 스페인의 펠리페 2세: 언니 메리의 남편이었던 인물로, 1559년에 거절당했다.
  • 로버트 더들리: 여왕이 가장 아낀 총신. 그러나 1560년 9월 그의 아내 에이미가 죽자 많은 사람이 더들리를 의심했고, 결혼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해졌다.
  • 앙주 공작 프랑수아: 여왕이 쉰 살 무렵이던 마지막 본격 혼담 상대였다.

혼담을 질질 끄는 것 자체가 외교 수단이었다. 그녀가 '아직 미혼'인 한 각국은 잉글랜드에 친절할 이유가 있었다. 1599년에는 백성을 가리켜 "나의 모든 남편들, 나의 선량한 백성"이라고 불렀다.

시인과 화가들은 그녀를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로, 1588년 이후에는 스펜서의 시 속 '요정 여왕' 글로리아나로 그렸다. 실제로는 1562년 천연두로 흉터가 남고 머리카락이 빠져 가발과 화장에 의지했다.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와 무적함대

가장 큰 위협은 사촌인 가톨릭 신자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였다. 1568년 잉글랜드로 피신한 메리는 19년 동안 갇혀 지냈고, 엘리자베스 암살을 노린 배빙턴 음모가 드러난 뒤 1587년 2월 8일 처형됐다.

1588년 7월 스페인 무적함대가 출항했고, 그라블린 앞바다에서 잉글랜드의 화공선 등에 패했다. 그래도 파르마 공작의 육군이 상륙할 수 있다는 걱정이 남아, 8월 엘리자베스는 흰 벨벳 드레스 위에 흉갑을 두르고 틸버리의 병사들 앞에 섰다. 가장 유명한 판본에서 그녀는 "내 몸은 연약한 여인의 것이지만, 나는 왕의 심장과 배짱을 지녔다"고 말한다. 다만 이 문장은 1654년에야 출판된 편지에서 나온 것이어서, 정말 그대로 말했는지는 역사가마다 의견이 갈린다.

힘겨운 말년과 '엘리자베스 시대'

말년이 마냥 빛나지는 않았다. 아일랜드의 9년 전쟁은 국고를 바닥냈고, 총신 에식스 백작은 1601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됐다. 엘리자베스는 1603년 3월 24일 리치먼드 궁전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44년의 통치였다.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고, 왕위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에게 넘어갔다.

결혼하지 않은 대가는 후사가 없어 왕조가 끊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그녀는 끝까지 자기 왕좌를 자기 손에 쥐고 있었다. 셰익스피어가 활약한 그 시대는 지금도 그녀의 이름을 따 '엘리자베스 시대'라고 부른다.

엘리자베스 1세로 배우는 한국어 표현

결정과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 쓰기 좋은 표현들이다.

표현 뜻 예문
정중히 거절하다 예의 바르게 받아들이지 않다 여왕은 청혼을 정중히 거절했다.
답을 미루다 대답을 나중으로 넘기다 그는 계속 답을 미뤘다.
마음을 굳히다 결심을 확실히 하다 혼자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
여지를 남기다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 않다 그녀는 늘 여지를 남겨 두었다.
주도권을 쥐다 일을 이끄는 힘을 갖다 끝까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연습: 내가 엘리자베스가 되어 또 한 통의 청혼 편지에 답장을 쓴다고 상상해 보자. '정중히 거절하다'와 '여지를 남기다'를 넣어 세 문장을 쓰고, 마지막에 상대를 칭찬하는 말을 덧붙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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