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년 성탄절에 왕관을 쓴 프랑크 왕: 카롤루스 대제는 정말 '유럽의 아버지'일까

카롤루스 대제가 '유럽의 아버지'로 불리는 까닭은 서유럽 대부분을 하나로 묶고, 서방 황제 자리를 되살리고, 법·교회·학문의 바탕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카롤루스 대제가 유럽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는,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처음으로 서유럽과 중부 유럽 대부분을 하나로 묶었고, 그가 다진 제도와 교회 질서, 교육이 이후 수백 년 동안 유럽의 모양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 748–814)는 768년부터 프랑크 왕, 774년부터 랑고바르드 왕, 800년부터는 오늘날 카롤링거 제국이라 부르는 나라의 황제였고, 서방에서 약 300년 만에 인정받은 첫 황제였습니다. 많은 역사가가 그를 "유럽의 아버지"라 부르고, 여러 유럽 국가가 그를 건국의 인물로 여기며, 여러 왕가가 그의 후손임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이 호칭은 칭찬만은 아닙니다. 학교를 세우고 책 필사를 장려한 바로 그 왕이 작센인에게 개종을 강요하고 포로를 대량 처형했기 때문입니다.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는 단신왕 피핀과 베르트라다의 맏아들입니다. 출생 연도는 오래 논쟁거리였지만 지금은 748년 4월이라는 견해가 대세이고, 태어난 곳은 알 수 없습니다. 이름은 "위대한 카롤루스"라는 뜻으로, 프랑스어로는 샤를마뉴, 독일어로는 카를 대제입니다. 폴란드어 król, 러시아어 korol'처럼 슬라브어에서 "왕"을 뜻하는 말도 카롤루스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게르만어를 모어로 쓰며 어려서부터 로망스어 방언도 했던 것으로 보이고, 라틴어도 말했습니다. 글을 읽을 줄 알았는지는 논란이 있습니다. 보통 글을 소리 내어 읽게 하고 답을 받아쓰게 했는데 이는 당시 글을 아는 군주에게도 흔한 일이었고, 전기 작가 아인하르트는 그가 늘그막에야 글쓰기를 배우려 했다고 적었습니다. 학문의 후원자로 기억되는 왕에게는 뜻밖의 모습입니다.

끝없는 전쟁

768년 피핀이 죽자 그는 동생 카를로만과 왕국을 나눠 다스렸고, 3년 뒤 혼자 왕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처럼 교황을 보호했고, 774년에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수도 파비아를 함락해 북이탈리아를 손에 넣었습니다. 이어 바이에른, 작센, 이베리아반도 북부로 세력을 넓혔습니다. 778년 이베리아 원정에서 돌아오던 길에는 롱스보 고개에서 바스크인의 매복 공격을 받았는데, 이 사건은 훗날 전설이 됩니다.

가장 길고 잔혹했던 싸움은 이교도 작센인과의 전쟁이었습니다. 782년 프랑크군이 패한 뒤, 연대기에 따르면 카롤루스는 페르덴에서 작센인 포로 4,500명의 목을 베게 했습니다. 역사가 프리트는 숫자는 부풀려졌을 수 있지만 사건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고 했고, 바르베로는 이를 그의 명성에 남은 가장 큰 오점이라고 불렀습니다. 뒤이어 나온 법령은 이교 풍습에 사형을 매겼고, 학자들은 이를 작센인의 정체성을 누르려는 강제 개종 계획으로 봅니다. "유럽의 아버지"를 정직하게 이야기하려면 이 장면도 함께 봐야 합니다.

800년 성탄절

799년 로마에서 정적들에게 습격당한 교황 레오 3세는 북쪽으로 피신해 카롤루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800년 성탄절 성 베드로 대성당 미사에서 레오는 카롤루스를 "로마인의 황제"로 선포하고 관을 씌웠습니다. 476년 서로마 마지막 황제가 폐위된 뒤 서방에서 처음으로 재위하는 황제가 나온 것입니다.

이 대관식의 의미는 지금도 논쟁거리입니다. 아인하르트는 카롤루스가 교황의 계획을 알았다면 성당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썼는데, 이를 사실로 보는 학자도 있고 겸손함을 보여 주려는 문학적 장치로 보는 학자도 있으며, 그가 늦어도 798년에는 황제가 될 생각이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대관식은 스스로를 유일한 로마 황제로 여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비잔티움 황제와 오랜 갈등, 이른바 "두 황제 문제"를 낳았습니다. 정작 카롤루스는 "로마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쓰지 않고 좀 더 중립적인 표현을 택했는데, 비잔티움과의 관계를 의식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 칭호 덕분에 그는 19세기까지 이어진 신성 로마 황제들의 선구자로 여겨집니다.

아헨에서 다스린 제국

801년 이후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끄는 일이 드물어졌고 주로 수도 아헨에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802년의 법령은 모든 자유민에게 충성 서약을 요구했고, 성직자 한 명과 세속 귀족 한 명이 짝을 지어 지방을 돌며 재판하고 감독하는 순찰사 제도를 정비했습니다. 프랑크법과 랑고바르드법의 개정도 명령했습니다. 교회 회의를 23번 열고, 제국 안 모든 수도원에 베네딕토 규칙을 따르게 했으며, 전례를 하나로 맞추려 했습니다. 역사가 노블은 서방 그리스도교도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중세의 "그리스도교 세계"라는 생각이 카롤링거 정책의 산물이라고 말합니다. 790년대에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와 사절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지금 우리가 쓰는 글자

가장 오래 남은 유산은 문화일지도 모릅니다. 요크의 알퀸처럼 잉글랜드, 아일랜드, 에스파냐, 이탈리아에서 온 학자들이 궁정에 모이면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는 학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와 수도원 학교에서는 라틴어, 문법, 산술을 가르쳤고, 9세기에 필사된 책은 약 9만 권으로 추정됩니다. 이 많은 책을 또렷하고 고르게 베끼기 위해 퍼진 글씨체가 카롤링거 소문자체입니다. 이 서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게 이어져 Times New Roman을 비롯한 오늘날 대부분 로마자 글꼴의 직계 조상이 되었습니다. 영어 소문자를 쓸 때마다 그의 궁정과 만나는 셈입니다.

죽음 뒤의 분열과 다툼

카롤루스는 814년 1월 28일 늑막염으로 세상을 떠나 아헨의 예배당에 묻혔습니다. 아들 루트비히가 죽은 뒤 제국은 베르됭 조약으로 서·동·중 프랑크로 나뉘었고, 이것이 훗날 프랑스와 독일의 밑그림이 됩니다. 그래서 16세기부터 그가 프랑스의 샤를마뉴인지 독일의 카를 대제인지를 두고 논쟁이 이어졌고, 나치는 그를 팽창 정책의 본보기로 끌어다 쓰려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19세기 독일 철학자 슐레겔이 처음 내놓은 "유럽의 아버지"라는 시각이 중심이 되었고, 그는 유럽 통합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49년부터 아헨시는 유럽의 화합에 힘쓴 사람에게 카롤루스 대제상을 주고 있으며, 윈스턴 처칠도 수상자입니다. 영향력으로 보면 "아버지"라는 이름이 어울리지만, 도덕적 평가로는 작센 전쟁을 함께 놓고 봐야 한다는 것이 공정한 답일 것입니다.

카롤루스 대제로 배우는 영어 표현

표현 뜻 예문
to lay the foundations 기초를 다지다 Charlemagne laid the foundations of medieval Europe.
a double-edged legacy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는 유산 The Saxon wars make his a double-edged legacy.
to rise to power 권력을 잡다 He rose to power after his father died.
to stand the test of time 세월이 지나도 가치가 남다 His handwriting reform stood the test of time.
to fall apart 산산이 흩어지다 His empire fell apart within two generations.

연습 과제: 우리 동네나 학교, 회사의 "기초를 다진" 사람을 영어 세 문장으로 소개하고, 그 유산이 "stood the test of time" 했는지도 덧붙여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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