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는 왜 '피아노의 왕'이라 불렸을까? 리스토마니아 열풍과 35세 은퇴
프란츠 리스트는 1840년대 '리스토마니아' 열풍을 일으킨 헝가리 출신 피아니스트입니다. 독주회를 처음 열었고, 35세에 순회공연을 그만뒀습니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가 유명한 이유는 19세기에 관객을 가장 뜨겁게 달군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입니다. 1840년대 그의 연주회에서는 팬들이 장갑과 손수건을 서로 차지하려 다퉜고,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이 소동에 '리스토마니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리스트의 명성은 화려한 무대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는 오늘날 의미의 첫 피아노 독주회를 열었고, 교향시라는 형식을 고안했으며, 마스터클래스라는 가르치는 방식을 처음 도입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그리고 인기의 정점에서 35세에 순회공연을 그만두었습니다.
헝가리 시골 마을의 신동
리스트는 1811년 10월 22일, 당시 헝가리 왕국에 속했던 도보르얀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오스트리아의 라이딩이라는 마을입니다.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문의 영지 관리인이자 열성적인 아마추어 음악가였습니다.
아홉 살에 쇼프론에서 공개 연주회를 연 소년은 가족과 함께 빈으로 옮겨, 카를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웠습니다. 체르니는 약 1년 반 동안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 무렵 베토벤을 만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확실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전해 내려오는 일화에 가깝습니다.
파리, 닫힌 문과 열린 도시
1823년 가족은 파리 음악원 입학을 바라고 파리로 갔지만, 음악원이 외국인을 받지 않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대신 개인 교습을 받으며 공부를 이어 갔고, 열네 살 생일 직전에는 오페라 '돈 산슈'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공연은 네 번 만에 끝났습니다.
1827년 아버지가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나자, 10대의 리스트는 피아노 교사로 일하며 어머니를 부양했고 그 생활은 약 8년 이어졌습니다. 파리에서 그는 1830년 12월 베를리오즈를, 1830년대 초에는 쇼팽을 만났습니다.
파가니니를 들은 날
1832년 4월, 리스트는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바이올린의 파가니니처럼 피아노의 거장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집념에서 나온 파가니니 연습곡집에는 지금도 사랑받는 '라 캄파넬라'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 여행, 그리고 '순례의 해'
1833년 리스트는 이미 결혼한 백작 부인 마리 다구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두 사람은 1835년부터 제네바에 살았고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블랑딘, 코지마, 다니엘 세 자녀를 두었습니다. 여행에서 본 풍경과 시, 그림은 피아노 모음곡 '순례의 해'로 태어났습니다. 두 사람은 1844년에 헤어졌습니다.
리스토마니아는 어떤 현상이었나
1840년 6월 9일 런던에서 리스트는 한 사람이 연주회 전체를 혼자 책임지는, 오늘날과 같은 독주회를 열었습니다. 약 8년 동안 그가 선 공개 무대는 1,000회가 넘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열풍의 출발점은 보통 1841년 12월 27일 베를린 첫 독주회로 봅니다. 팬들은 그의 머리카락을 원했고, 초상을 새긴 브로치를 달았으며, 마시다 남긴 커피 찌꺼기를 유리병에 담아 간직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궁정 여인은 그가 버린 시가 꽁초를 다이아몬드가 박힌 로켓에 넣어 두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이네는 1844년 4월 25일자 글에서 이 말을 처음 쓰며 관객의 반응을 "진정한 광기"라고 표현했습니다. 당시 '마니아'라는 말은 의학 용어처럼 들려서, 일부 비평가는 이 현상을 전염병처럼 다루기도 했습니다.
리스트는 명성을 자기만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1842년 함부르크 대화재 피해자들과 쾰른 대성당 완공을 위해 자선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35세의 결단과 바이마르 시절
1847년 우크라이나 순회 중 리스트는 카롤리네 자인비트겐슈타인 공작 부인을 만났습니다. 그해 9월 마지막 유료 연주회를 끝으로, 35세에 연주 무대에서 물러났습니다.
1848년부터는 바이마르 궁정 악장으로 일하며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초연했고, 이야기나 생각을 한 악장 안에 그려 내는 교향시를 발전시켰습니다. 카롤리네와는 1861년 리스트의 쉰 번째 생일에 로마에서 결혼하려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가로막혀 식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리스트 신부'로 보낸 말년
두 자녀 다니엘과 블랑딘이 1859년과 1862년에 잇따라 세상을 떠난 뒤, 리스트는 로마로 가서 1865년 가톨릭의 하급 성직을 받았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그를 '리스트 신부'라고 불렀습니다. 1870년대부터는 로마·바이마르·부다페스트를 오가는 '셋으로 나뉜 삶'을 살았고, 바이마르에서 17년 동안 마스터클래스를 열었습니다. 부다페스트 왕립 음악원의 원장이 되었는데, 이 학교는 지금 리스트 음악원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1886년 7월 31일, 딸 코지마가 이끄는 음악제를 보러 간 바이로이트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식 사인은 폐렴이었습니다.
리스트로 배우는 한국어 표현
| 표현 | 뜻 | 예문 |
|---|---|---|
| 선풍을 일으키다 | 큰 유행을 만들다 | 리스트는 1840년대 유럽에 선풍을 일으켰다. |
| 이름을 떨치다 | 널리 알려지다 | 그는 젊은 나이에 이름을 떨쳤다. |
| 우레와 같은 박수 | 아주 크고 긴 박수 | 연주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
| 박수 칠 때 떠나다 | 잘될 때 물러나다 | 그는 박수 칠 때 떠나는 길을 택했다. |
| 후배를 키우다 | 다음 세대를 가르치다 | 말년에는 후배를 키우는 데 힘을 쏟았다. |
연습: 1841년 베를린의 기자가 되었다고 상상하고, '선풍을 일으키다'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넣어 리스트의 연주회를 세 문장으로 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