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는 왜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쐈을까? 서른 해 삶과 끝내지 못한 동양평화론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이듬해 뤼순에서 순국했습니다. 사업가·교육자에서 의병이 되기까지, 그리고 끝내지 못한 글까지 정리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는, 그를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아 가는 일의 중심인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잃은 뒤 그는 학교를 세우는 일에서 무장 투쟁으로 길을 바꾸었고, 체포된 뒤 첫 신문에서는 이토의 '열다섯 가지 죄'를 조목조목 밝혔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이토가 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고 안중근은 그가 지나가는 순간 총을 쏘았습니다. 세 발이 이토에게 맞았고, 그는 러시아어로 한국의 독립을 외쳤습니다. 교과서 한 줄로 기억되는 이 장면 뒤에는, 서른 해라는 짧지만 여러 번 방향을 바꾼 삶이 있습니다.

해주에서 태어난 '응칠'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고, 자(字)는 응칠이었습니다. 열여섯 살 때 아버지와 함께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도마)'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프랑스어도 배웠습니다. 신앙과 외국어는 황해도의 한 청년에게 바깥세상을 내다보는 창이 되었습니다. 훗날 그가 동양 전체의 평화를 이야기하게 된 데에는, 이렇게 일찍부터 넓은 세계를 접한 경험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사업가에서 교육자로

스물다섯 살 무렵 그는 석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사업 대신 교육에 뛰어들어, 한반도 서북 지역에 사립 학교를 세웠습니다. 나라가 기울어 갈 때 사람을 길러 힘을 키우자는 '교육 구국'의 길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총을 든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은 안중근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대목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의병

상황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1907년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무장 항일 투쟁에 합류했고, 뒤에 의병 부대의 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학교를 세우던 사람이 군복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 선택의 무게는 그가 남긴 다음 장면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손가락을 끊어 맺은 맹세

1909년 1월, 러시아 연추에서 안중근을 포함한 열두 명이 각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고, 그 피로 태극기에 '大韓獨立(대한독립)'이라고 썼습니다. 영어 위키백과는 이 맹세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겠다는 다짐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몸의 일부를 걸고 한 약속은 오늘날의 눈으로는 섬뜩할 만큼 격렬하지만, 나라가 사라지기 직전이던 그 시절 젊은이들이 느낀 절박함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하얼빈역의 세 발

1909년 10월,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FN M1900 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에게 세 발을 쏘았고, 함께 있던 일본인 세 명도 다쳤습니다. 당시 하얼빈역은 러시아가 관할하던 곳이어서, 그는 먼저 러시아 경비병에게 이틀 동안 붙잡혀 있다가 일본 당국에 넘겨졌습니다. 같은 해 10월 30일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의 첫 신문에서 그는 이토의 죄 열다섯 가지를 들었습니다.

뤼순 법정과 끝내지 못한 「동양평화론」

1910년 2월 뤼순 법원에서 여섯 차례 공개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는 자신을 전쟁 포로로 대우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항소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동양평화론」을 마칠 시간을 기대했지만, 도쿄가 서둘러 집행하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글은 미완으로 남았습니다. 3월 1일에는 빌렘 신부가 찾아와 고해성사를 듣고 성체를 주었습니다. 처형 전날인 3월 25일, 그는 두 동생에게 자신의 유해를 먼저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국권을 되찾으면 고국으로 옮겨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그는 뤼순 감옥에서 서른 살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옥중 유묵과 아직 찾지 못한 유해

감옥에서 안중근은 간수·헌병·통역 등에게 백여 점의 글씨를 써 주었습니다.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같은 구절이 대표적입니다. 1972년 그의 유묵 일부는 보물 제56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생들에게 남긴 당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해는 지금까지 찾지 못했고, 서울 효창공원에는 유해 없는 가묘만 있습니다.

국경을 넘어 기억되는 이름

안중근에 대한 기억은 한국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위안스카이, 쑨원, 량치차오 같은 중국 인물들이 공개적으로 그를 기렸습니다. 2014년 하얼빈역에는 안중근 기념관이 문을 열었고, 2017년 이전을 거쳐 2019년에 다시 개관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습니다. 한때 천주교회에서 파문되었던 그의 처분도 1993년에 풀렸습니다.

안중근으로 배우는 한국어 표현

표현 뜻 예문
목숨을 걸다 죽음을 무릅쓰고 하다 그는 목숨을 걸고 독립을 외쳤다.
뜻을 품다 마음속에 큰 목표를 지니다 젊은 안중근은 나라를 구할 뜻을 품었다.
미완으로 남다 끝내지 못한 채로 남다 「동양평화론」은 미완으로 남았다.
당부하다 꼭 해 달라고 부탁하다 그는 동생들에게 유해를 옮겨 달라고 당부했다.
기리다 훌륭한 뜻이나 업적을 칭찬하고 기억하다 많은 사람이 지금도 그를 기린다.

연습 과제: '뜻을 품다'와 '당부하다'를 넣어, 내가 외국어를 배우며 품은 목표와 미래의 나에게 하고 싶은 부탁을 세 문장으로 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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