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은 몇 살에 귀주대첩을 이끌었을까? 문관 출신 노장의 전략

강감찬은 몇 살에 귀주대첩을 이끌었을까? 문관 출신 노장의 전략

강감찬은 71세에 상원수로 나서 1019년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과거 장원 문관이 어떻게 이겼는지 정리했다.

강감찬은 71세에 고려군을 이끌고 거란(요)의 3차 침입에 맞섰고, 1019년 귀주에서 물러가던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 노장은 원래 무관이 아니었습니다. 36세에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해 평생 문관으로 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긴 방법은 정면 대결이 아니라, 적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고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고려와 거란, 그리고 1010년의 위기

고려는 918년에 세워진 왕조로 도읍은 개경(지금의 개성)이었습니다. 북서쪽에서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만주와 몽골, 화북 일부를 다스리며 세력을 키웠습니다. 두 나라는 여러 차례 싸웠고, 1010년에는 거란군이 개경까지 내려왔습니다. 이때 강감찬은 항복하지 말고 도성을 떠나라고 현종에게 권했고, 왕은 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1018년 소배압이 약 10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다시 쳐들어왔습니다.

과거 장원에서 상원수로

강감찬은 948년 금주, 지금의 서울 관악구 일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섬긴 인물입니다. 964년 아버지를 여읜 뒤 전국을 돌아다녔고, 983년 36세에 과거에서 장원을 했습니다. 이후 교육과 왕실 문서를 다루는 벼슬을 거쳐 1011년에는 왕의 글을 짓는 한림학사가 되었습니다.

1018년 침입 소식이 오자 그는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스스로 지휘를 맡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때 나이가 71세였고, 이끈 군사는 약 20만 8천 명으로 기록됩니다. 옛 기록의 병력 숫자는 출처마다 달라 대략적인 규모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흥화진의 물길

싸움 초반 흥화진에서 고려군은 냇물을 막아 두었다가 거란군이 건널 때 둑을 터뜨려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강한 적과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 지형을 이용하는 강감찬의 방식이 잘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보급을 끊고 끝까지 따라붙다

그래도 거란군은 남쪽으로 내려와 개경 가까이까지 다가왔습니다. 강감찬은 한 번의 큰 싸움에 모든 것을 걸지 않았습니다. 대신 보급로를 끊고 쉬지 않고 적을 괴롭혔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진 거란군은 서둘러 북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1019년 3월 10일, 귀주

물러가던 거란군을 고려군이 귀주(지금의 북한 구성) 근처에서 따라잡아 크게 이겼습니다. 거란군 지휘관은 겨우 몇 명만 데리고 빠져나갔다고 전합니다. 귀주대첩은 한국 군사사에서 손꼽히는 승리로 평가됩니다.

전쟁 뒤의 평화를 보는 두 시각

전쟁 뒤 두 나라는 협상을 했고, 거란은 다시 고려를 침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내용을 두고는 해석이 갈립니다. 고려가 요에 조공하는 관계를 받아들이고 압록강 일대 땅을 지켰다고 보는 설명이 있고, 고려가 송과의 관계와 독자적인 연호를 유지한 채 1022년 대등하게 화친했다고 보는 설명도 있습니다.

낙성대 전설과 오늘의 강감찬

강감찬은 1020년 물러났고 1031년 8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날 별이 집으로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어, 그곳을 '별이 떨어진 터'라는 뜻의 낙성대라 부릅니다.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이름도 여기서 왔습니다. 관악구 사당동에는 그를 모신 사당 안국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을지문덕, 이순신과 함께 나라를 지킨 장수로 꼽습니다.

강감찬으로 배우는 한국어 표현

표현 뜻 예문
장원 급제 과거에서 일등으로 합격함 그는 983년 장원 급제했다.
자청하다 스스로 맡겠다고 나서다 일흔한 살에 지휘를 자청했다.
보급로를 끊다 물자가 오는 길을 막다 고려군은 적의 보급로를 끊었다.
모든 것을 걸다 한 번에 전부를 내걸다 한 번의 싸움에 모든 것을 걸지 않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가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연습: 늦은 나이에 새로운 일에 도전한 사람을 한 명 떠올려, '자청하다'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를 넣어 세 문장으로 소개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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