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는 어떻게 아우내 만세운동을 이끌었을까? 이화학당 학생에서 서대문형무소까지
유관순(1902–1920)은 이화학당 학생으로 3·1 운동에 참여한 뒤 고향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날짜순으로 정리했습니다.
유관순은 서울에서 3·1 운동에 참여한 뒤,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으로 내려가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이날 약 3,000명이 모였고, 일본 헌병의 발포로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유관순은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서도 만세를 멈추지 않았고,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과서에서 한 줄로 배우는 이름이지만, 날짜를 따라가 보면 열여섯 살 학생이 내린 선택들이 하나씩 보입니다.
1919년, 왜 만세를 외쳤나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고 강한 동화 정책을 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뒤 미국 윌슨 대통령이 말한 '민족 자결'은 식민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고,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독살설이 퍼지며 민심이 들끓었습니다.
3월 1일, 종교계 등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만세 시위는 서울에서 시작해 전국과 해외 동포 사회로 번졌습니다. 운동은 대부분 비폭력 시위였습니다.
천안에서 이화학당으로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 근처에서 세 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영향으로 개신교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서울 이화학당(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에는 졸업 후 교사로 일한다는 조건의 장학생으로 들어갔고, 1919년에는 교사의 권유로 학생 문학회에 참여했습니다.
날짜로 따라가는 1919–1920년
| 날짜 | 일어난 일 |
|---|---|
| 1919. 3. 5. | 남대문까지 행진하다 경찰에 붙잡혔으나 학교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풀려남 |
| 1919. 3. 10. | 총독부가 학교에 휴교령을 내림 |
| 1919. 3. 13. | 서울을 떠나 고향 지령리로 돌아감 |
| 1919. 4. 1. |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부모 순국, 본인 체포 |
| 1919. 5. 9. | 징역 5년 선고 |
| 1919. 6. 30. |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
| 1920. 3. 1. | 3·1 운동 1주년, 옥중 만세 계획 |
| 1920. 4. 28. | 감형으로 형기 1년 6개월로 줄어듦 |
| 1920. 9. 28. | 옥중 순국 |
위 날짜는 모두 영어판 위키백과의 정리를 따랐습니다.
아우내 장터의 하루
시골에서 장날은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날이었습니다. 1919년 4월 1일, 음력으로는 3월 1일인 이날 아우내 장터에 약 3,000명이 모여 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오후 1시 무렵 일본 헌병이 총을 쏘았고, 19명이 숨졌습니다. 그 가운데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가 있었습니다.
체포된 유관순은 천안과 공주의 경찰서를 거치며 함께 붙잡힌 오빠를 만났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협조하면 형을 가볍게 해 주겠다는 회유를 받았지만 끝내 거절하고 침묵했다고 합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그는 보안법 위반 등으로 재판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3·1 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 함께 수감된 이신애·어윤희 등과 만세를 계획했고, 그 뒤 고문을 받고 따로 갇혔습니다.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나이는 계산법에 따라 17세 또는 18세로 적힙니다. 당국은 처음에 시신을 내주지 않았지만, 이화학당의 미국인 선교사 교장 룰루 프라이와 지넷 월터가 강하게 요구해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조용히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그 자리에 일본군 기지가 들어서면서 묘가 사라져, 지금 천안의 묘는 시신이 없는 빈 묘입니다.
3·1 운동이 남긴 것
3·1 운동은 곧바로 독립을 가져오지 못했고, 외국 정부의 공식 지지도 얻지 못했습니다. 희생자 수는 지금도 자료마다 다릅니다. 일본 당국은 4월 중순까지 사망자를 553명으로 보고했고, 박은식은 7,500명이 넘는다고 추산했으며, 현대의 데이터베이스는 그 사이의 숫자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운동은 독립운동에 힘을 불어넣어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 총독부가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방향을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유관순
정부는 1951년 그를 순국열사로 인정했고, 1962년 건국훈장을 추서했습니다. 1972년에는 천안 병천면에 추모각이 세워졌고, 2018년 뉴욕타임스는 당시 부고를 싣지 못한 인물을 다루는 'Overlooked' 시리즈에서 그를 소개했습니다. 성은 '유'와 '류'로 함께 쓰이며, 기념사업회는 2001년 '류'로 바꿨다가 2014년 다시 '유'로 되돌렸습니다.
유관순으로 배우는 한국어 표현
| 표현 | 뜻 | 예문 |
|---|---|---|
| 앞장서다 | 무리의 맨 앞에서 이끌다 | 유관순은 고향의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
| 목숨을 잃다 | 죽다 | 그날 장터에서 19명이 목숨을 잃었다. |
| 회유를 거절하다 | 달래며 꾀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다 | 그는 끝까지 회유를 거절했다. |
| 뜻을 굽히지 않다 | 생각이나 신념을 바꾸지 않다 | 감옥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
| 기리다 | 훌륭한 일이나 사람을 칭찬하며 기억하다 | 해마다 많은 사람이 그를 기린다. |
연습: '앞장서다'와 '뜻을 굽히지 않다'를 넣어, 존경하는 인물을 두 문장으로 소개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