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는 어떤 사람일까? '오와리의 바보'에서 일본 통일의 첫걸음까지
오다 노부나가는 놀림받던 젊은 영주에서 조총과 자유 시장, 가차 없는 전쟁으로 일본 최고 실력자가 되었지만 1582년 부하에게 배신당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1534–1582)는 백 년 넘게 이어진 일본의 전국 시대에 재통일의 길을 연 다이묘(영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일본의 '세 통일자' 가운데 첫 번째로 꼽힙니다. 그는 조총의 대량 활용 같은 군사 혁신과 경제 개혁, 그리고 강력한 불교 세력까지 가차 없이 무너뜨리는 냉혹함을 함께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천하 통일이 눈앞에 보이던 순간, 자기 부하에게 배신당합니다.
'오와리의 바보'
노부나가는 1534년 일본 중부의 오와리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교토의 쇼군은 실권을 잃었고 각지의 영주들이 끝없이 싸우던 때였습니다. 젊은 노부나가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행동으로 '오와리의 큰 바보'라는 별명을 얻었고, 많은 사람이 그를 얕보았습니다. 그것이 큰 착각이었음은 곧 드러났습니다.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
이해 강력한 영주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를 지나갔습니다. 노부나가의 병력은 훨씬 적었지만 오케하자마에서 기습을 감행했고, 요시모토는 전사했습니다. 이 승리로 노부나가의 이름이 크게 알려졌습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오와리와 미노를 평정한 뒤 '천하포무(天下布武)'라 새긴 도장을 쓰며 천하 통일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교토 입성과 무로마치 막부의 끝
1568년 그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어 교토에 들어가 쇼군으로 세웠지만, 사이가 틀어지자 1573년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쫓아냈고 무로마치 막부는 사실상 끝났습니다.
가차 없는 전쟁
아사쿠라·아자이 가문을 무너뜨리고, 1571년에는 히에이산 엔랴쿠지를 불태웠으며, 오랜 싸움 끝에 1580년 무장 불교 세력 잇코잇키의 거점 이시야마 혼간지를 손에 넣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당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지금도 그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이유입니다.
조총과 나가시노 전투
그는 일본에 들어온 지 몇십 년밖에 안 된 화승총을 적극 받아들여 대량으로 투입했습니다. 1575년 이에야스와 함께 나가시노에서 다케다 가문의 이름난 기마대를 꺾었지만, 총병을 세 줄로 번갈아 쏘게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의 세부는 오늘날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문시됩니다.
아즈치성, 라쿠이치 라쿠자, 선교사
1576년부터 1579년까지 비와호 근처에 아즈치성을 쌓았고, 이것이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성 아래 마을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하게 한 '라쿠이치 라쿠자'로 낡은 상인 조합의 독점을 깨뜨렸고, 예수회의 포교도 허용했습니다.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은 노부나가 연구의 중요한 자료입니다. 선교사들과 함께 온 아프리카 출신 야스케가 1581년 노부나가를 섬긴 일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혼노지의 변
1582년 적은 호위만 거느리고 교토 혼노지에 머물던 노부나가는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습격을 받고 불길 속에서 할복했습니다. 미쓰히데가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는 아직도 논쟁거리입니다. 곧 또 다른 부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쓰히데를 꺾었고, 1590년 일본 통일을 완성했습니다. "노부나가가 떡을 찧고, 히데요시가 반죽하고, 이에야스가 앉아서 먹었다"는 일본의 말이 세 사람의 관계를 잘 보여 줍니다.
오다 노부나가로 배우는 우리말 표현
| 표현 | 뜻 | 예문 |
|---|---|---|
| 얕보다 | 실제보다 낮게 보다 | 조용한 학생을 얕보지 마라. |
| 틀을 깨다 |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다 | 그는 영주의 틀을 깼다. |
| 등에 칼을 꽂다 | 믿던 사람을 배신하다 | 부하가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 |
| 눈앞에 두다 | 거의 이룰 단계에 있다 | 통일을 눈앞에 두고 쓰러졌다. |
| 선견지명 | 앞일을 내다보는 지혜 | 조총을 중시한 선견지명이 있었다. |
연습 과제: 노부나가는 '바보' 소리를 들었지만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누군가 나를 얕봤던 경험을 "얕보다", "틀을 깨다"를 넣어 세 문장으로 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