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 왕희지: 난정의 모임과 1,300년 동안 아무도 보지 못한 최고 걸작

왕희지(303년경–361)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예가 '서성'으로 불립니다. 난정의 모임과 『난정서』, 그리고 그의 진필이 하나도 남지 않은 까닭을 정리했습니다.

왕희지(303년경–361)는 동진의 관리이자 장군, 서예가로,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예가로 꼽힙니다. 해서·행서·초서에 모두 능했고, 『난정서(난정집서)』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서예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의 진필은 한 획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늘날 보는 것은 모두 베낀 글씨나 윤곽을 따라 그린 본, 돌에 새겨 뜬 탁본입니다.

남쪽으로 피란한 명문가의 아들

왕희지는 지금의 산둥성 린이에 해당하는 낭야군에서, 당대 가장 힘 있는 귀족 가문 가운데 하나에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서진이 무너지자 집안은 조정을 따라 남쪽으로 피란했습니다. 어려서는 말이 어눌했지만 커서는 말솜씨가 좋아졌다고 합니다. 서예는 친척들에게 배웠는데, 그중에는 이름난 서예가 위부인(위삭)도 있었습니다. 323년 무렵 치선과 혼약해 여덟 자녀를 두었고, 그중 왕헌지는 아버지와 나란히 일컬어질 만큼 유명한 서예가가 되었습니다.

고요함을 바란 관리

324년부터 354년까지 왕희지는 궁중 도서관 보좌에서 군사 참모, 지방관까지 여러 벼슬을 지냈습니다. 조정의 정치에서 떨어져 문화에 힘쓸 수 있는 외진 자리를 원했고, 마침내 호수와 산이 많은 회계(지금의 저장성 사오싱)의 장관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은 대부분 그가 쓴 편지와 후대의 일화집에서 나왔고, 오늘날 학자들은 이를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난정의 모임

353년 음력 3월 3일(양력 4월 22일), 왕희지는 회계산 기슭의 난정에 벗과 친척, 제자 41명을 모아 봄맞이 행사를 열었습니다. 굽이진 물길에 술잔을 띄워, 잔이 자기 앞에 멈추면 시를 짓거나 벌주를 마시는 놀이였습니다. 저녁에 시를 모으자, 거나하게 취한 왕희지가 그 서문을 썼습니다. 324자의 짧은 글에서 그날의 아름다움을 그린 뒤, 삶의 덧없음과, 훗날 사람들이 지금을 돌아보는 것이 지금 우리가 옛날을 돌아보는 것과 같으리라는 생각으로 나아갑니다.

사라진 진필

『난정서』는 중국 서예사에서 가장 높이 받드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당 태종이 이를 몹시 아껴 진필을 손에 넣은 뒤 자기 무덤에 함께 묻게 했다고 합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진필은 그 뒤로 누구도 보지 못했습니다. 남은 것은 당나라 명필들의 모사본, 정성 들인 쌍구본, 돌에 새겨 뜬 탁본이며, 천 년 넘게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글 속에 스무 번쯤 나오는 '之' 자가 모두 다르게 쓰였다는 점은 지금도 서예 선생님들이 즐겨 짚는 대목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글씨를 바탕으로 한 법첩으로 여러 세대가 글씨를 익혔습니다.

왕희지로 배우는 중국어

중국어 뜻 예문
书法 (수파) 서예 我在学书法。
毛笔 (마오비) 붓 用毛笔写字。
兰亭 (란팅) 난정 兰亭在绍兴。
临摹 (린모) 본을 보고 따라 쓰다 我每天临摹字帖。
书圣 (수성) 서성 王羲之被称为书圣。

연습 과제: '之' 자를 서로 다른 모양으로 다섯 번 써 보고, 본을 따라 익힌 기술 하나를 우리말 세 문장으로 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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