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는 어떻게 후궁에서 중국 유일의 여황제가 되었을까?
당 태종의 후궁이던 측천무후는 고종의 황후를 거쳐 690년 스스로 황제에 올랐습니다. 그 과정과 통치, 엇갈리는 평가를 정리했습니다.
측천무후는 당 태종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와, 태종이 죽은 뒤 그 아들 고종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고, 655년 황후가 된 뒤 병약한 고종을 대신해 실권을 쥐었습니다. 고종이 죽은 뒤에는 아들 중종과 예종을 차례로 폐위하며 정치를 이끌었고, 마침내 690년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이론의 여지 없이 군주로 통치한 여성은 그녀가 유일합니다. 후궁에서 황제까지, 약 반세기에 걸친 상승이었습니다.
열두 살에 들어간 궁
측천무후는 624년 무사확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영어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부모는 딸의 교육에 힘을 쏟았고, 그녀의 개인 이름은 무조(武曌)였습니다. 한국어판 위키백과는 그녀가 12세에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해 재인(才人)에 봉해졌다고 적고 있습니다. 재인은 후궁 가운데 높은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비구니가 될 운명을 뒤집다
649년 태종이 죽자, 관례에 따라 그녀는 감업사에서 비구니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선황의 후궁은 남은 평생을 절에서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태종의 아들 고종이 그녀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당시 후궁에서는 왕황후와 소숙비가 대립하고 있었고, 그녀는 두 사람을 밀어내고 655년 황후에 올랐습니다. 654년 그녀의 어린 딸이 죽자 왕황후가 의심을 받았는데, "측천무후가 자기 딸을 죽여 황후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이야기는 확인할 수 없는 전승이며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습니다.
황후가 된 뒤의 숙청
황후가 된 그녀는 반대파를 거침없이 제거했습니다. 외숙부 장손무기 일가를 몰락시키고, 기존 태자 이충을 폐위해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친아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태자 이홍은 675년에 죽었는데 전통적으로는 독살되었다고 전해지고, 또 다른 아들 이현은 680년에 태자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660년 무렵부터 고종이 병으로 정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자, 그녀가 점점 국정을 맡게 되었고 두 사람은 "이성(二聖)", 곧 두 성인이라 불렸습니다.
아들들을 내세운 통치, 그리고 즉위
683년 고종이 죽은 뒤 그녀는 중종과 예종을 차례로 폐위하며 직접 정사를 맡았습니다. 이에 반발한 서경업이 군사를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그녀는 여론을 움직여 여제 즉위의 명분을 쌓아 갔습니다.
690년 그녀는 국호를 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유교 전통은 여성 황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사찰과 미륵 신앙을 활용해 자신의 통치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한 것입니다.
혹리와 과거, 두 얼굴의 통치
즉위 초에는 혹리를 동원해 당 황실 종친과 옛 대신들을 숙청했고, 나중에는 그 혹리들마저 제거했습니다. 익명 투서를 넣는 구리 상자까지 두어 밀고를 받았는데, 이런 공포 정치는 692년 무렵부터 누그러졌다고 합니다.
한편 과거제를 정비해 신진 인재를 등용했고, 적인걸 같은 유능한 재상을 중용했습니다. 그녀의 치세는 "무주의 치"라고도 불리며, 농민 봉기가 거의 없었고 장안은 인구 100만 명이 넘는 국제도시로 성장했다고 평가됩니다. 여성의 집권에 비판적이던 송나라 역사가 사마광조차 사람을 알아보는 그녀의 안목은 인정했습니다.
후계자 고민과 신룡정변
말년의 그녀는 조카 무승사에게 황위를 넘길지 고민했지만, 699년 유폐되어 있던 아들을 다시 태자로 세웠습니다. 무씨 가문으로 나라를 잇느냐, 당의 이씨 황실로 되돌리느냐는 그녀에게 마지막까지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705년 그녀가 병에 걸리자 재상 장간지 등이 군사를 이끌고 정변을 일으켜 총애받던 장씨 형제를 죽이고 당 황조를 복원했습니다. 중종이 다시 즉위했고, 그녀는 같은 해 11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어판 위키백과는 그녀가 낙양에서 약 81세로 사망했다고 적습니다.
아무 글자도 없는 비석
그녀는 유언으로 황후의 칭호로 불리기를 청했고, 고종과 합장된 건릉의 비석에는 아무 글자도 새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건릉 앞에는 "무자비(無字碑)"가 서 있습니다. 자신의 공과는 후세가 판단하라는 뜻이었다는 해석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후대의 해석일 뿐 그녀가 직접 남긴 설명은 아닙니다.
평가는 지금도 엇갈립니다. 후세 유학자들은 여성이 황위를 찬탈했다며 비판해 왔지만, 그녀의 인재 등용과 안정된 통치가 현종 시기 "개원의 치"의 토대가 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습니다.
측천무후로 배우는 한국어 표현
| 표현 | 뜻 | 예문 |
|---|---|---|
| 두각을 나타내다 | 재능이 눈에 띄다 | 그녀는 궁에서 곧 두각을 나타냈다. |
| 실권을 쥐다 | 실제 권력을 가지다 | 고종이 병들자 황후가 실권을 쥐었다. |
| 공과가 엇갈리다 | 잘한 점과 잘못한 점이 함께 있다 | 그녀의 통치는 공과가 엇갈린다. |
| 판을 뒤집다 | 상황을 완전히 바꾸다 | 비구니가 될 운명이던 그녀가 판을 뒤집었다. |
| 후대에 맡기다 | 평가를 뒷사람에게 넘기다 | 무자비는 평가를 후대에 맡긴 것이라고도 한다. |
연습: 역사 인물 한 명을 골라 "두각을 나타내다", "공과가 엇갈리다"를 넣어 세 문장을 써 보세요.